연락처를 쭉 훑어보며 인간관계를 한번 싹 정리했다… 이럴 땐 피도 눈물도 없는 나의 모습(?)
- Released
- 2026.11.06
- Runtime
- 55:33
- Read
- 14 min
- Host
- Sogo Kim
팟캐스트 카테고리의 글은 실제 팟캐스트를 AI가 텍스트로 변환하여 읽기 편한 문장으로 다듬은 것입니다.
실제로 말한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되었고 사람의 손을 거치지 않은 글이기 때문에 일부 표현이나 문맥이 다소 어색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며칠 전 휴대전화 연락처를 한 차례 비웠습니다. 번호를 지우는 정도가 아니라 상대가 저에게 연락할 수 있는 길을 모두 막는 일이었고, 차단 목록에 오른 이름의 상당수는 제가 20대에 처음 만난 사람들이었습니다.
연락처를 비우는 날
저는 정해진 주기 없이, 때가 되었다고 느낄 때마다 한 번씩 인간관계를 정리합니다. 제가 말하는 정리는 연락처를 모두 차단해서 그 사람이 저에게 닿을 수 있는 경로를 전부 없애는 작업입니다. 저는 제 바운더리 안에 들어온 사람에게는 진심을 다하는 편이어서, 그 사람의 입장을 헤아리고 제가 베풀 수 있는 최대한의 호의와 배려를 건네려고 노력합니다. 그런데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는 말처럼, 그 배려를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이 생기고, 잘해 줄수록 저를 아래로 내려다보는 사람도 생깁니다. 상대는 그것이 제가 에너지를 깎아 가며 만든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모릅니다. 저의 체력과 에너지는 무한하지 않아서 세상 모든 사람에게 같은 크기로 쓸 수가 없고, 그래서 저는 그 노력의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들과만 관계를 이어 가고 싶습니다. 지금 제 곁에서 연락을 주고받는 사람들은 저를 알아주는 사람들이고, 저는 그 알아줌이 너무 고마워서 그들에게 더 잘해 주고 싶어집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피도 눈물도 없이 선을 긋는데, 이렇게 된 데에는 제가 한 번 완전히 무너져 본 경험이 있습니다.
다른 뺨마저 내어 주던 시절
20대의 저는 제가 희생하고, 참고, 감내하고, 그냥 이해해 버리는 것이 도덕적으로 절대적으로 옳은 일이라고 믿었습니다. 그 믿음의 바탕에는 종교가 있었습니다. 저희 집안에는 종교를 가진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저는 스물두세 살 무렵 혼자 제 발로 성당을 찾아가 예비자 교리를 받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 시기의 저는 성경을 거의 외우다시피 읽었고, 한때는 수녀가 되겠다고 주변을 시끄럽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마태오 복음서 5장에는 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라는 가르침이 있고, 요한 복음서 16장에는 세상에서는 고난을 겪겠지만 용기를 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저는 이런 구절들을 제 일상에서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 길이 고되더라도 고통을 견디는 것까지가 신자로서 마땅히 감내할 몫이라고 여겼습니다. 착한 아이로 보이고 싶은 마음과는 결이 달랐던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을 품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종교를 가진 뒤에 생겼고, 저에게는 그것이 신앙의 문제였습니다. 스물다섯 살 이후로는 성당에 나가지 않았으니 벌써 12년이 지났지만, 천주교가 일상 속의 신앙을 강조하는 종교이기도 해서 미사에 나가지 않는 동안에도 그 생각은 오래 마음속에 남아 있었습니다.
칸트를 읽으며 찾던 마음속의 법
무엇이 옳은가라는 질문은 저를 자연스럽게 철학과 윤리학으로 데려갔습니다. 제가 찾던 것은 법령으로서의 법이 아니라 길, 곧 도(道)로서의 법이었고, 제가 마음속에서 따라야 할 그 법을 어떻게 세울 수 있는지가 20대 초중반의 저에게는 큰 숙제였습니다. 그래서 칸트를 붙들고 씨름했고, 피타고라스나 데모크리토스 같은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말부터 플라톤의 《국가》,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까지 동양과 서양을 가리지 않고 고전과 원전을 닥치는 대로 읽었습니다. 많이 읽은 만큼 많이 썼고, 일기를 쓰고 글을 쓰고, 영감을 줄 만한 어른들을 찾아 여기저기 다니기도 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나이에 무엇을 해서 돈을 벌고 살지를 고민했어야 했고, 그 고민을 했다면 지금의 제가 어떤 모습일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 시절의 저는 그런 데에는 관심이 없었고, 어떤 도덕적, 윤리적 기준을 세워 살아야 하는지에 완전히 빠져 있었습니다. 그 모든 과정을 거쳐 제 안에 자리 잡은 가치관은 이것이었습니다. 다 참고, 다 이해하고, 품을 수 있는 만큼 최대한 품는 것이 내가 가야 할 길이고, 그 고통을 받아들이는 것까지가 그 길의 일부라는 생각입니다.
부패를 이해해 버린 감사관
제가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한 것은 스물일곱, 스물여덟 살에 7급 공무원이 되었을 때였습니다. 어디 가서 공무원을 그만둔 이유를 말할 때 저는 보통 적성이나 조직 문화가 맞지 않았다는 말로 넘어가곤 합니다. 구구절절 사연을 늘어놓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제가 가장 힘들었던 것은 그 안에 있던 조직적인 부패였습니다. 그 부패는 한두 사람의 잘못이 아니라 조직 전체가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는 문제였고, 개인 한두 명이 소신을 지킨다고 나아질 성격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의 도덕적 해이도 있었지만 제도 자체가 잘못 설계되어 있었고, 그 제도를 설계하는 입법자들은 국회, 곧 조직 바깥에 있었습니다. 엄밀히 말해 법을 어기는 일은 없었습니다. 다만 법에 구멍이 숭숭 나 있으니 그 구멍을 이용한 편법이 자라났고, 겉으로는 법질서를 잘 지키고 있어도 법이 만들어진 취지까지 따져 보면 이것을 정말 법을 지킨다고 말할 수 있을까 싶은 일들이 제 눈에는 많이 보였습니다. 저는 양심을 지키며 돈을 벌고 싶었는데, 그 조직의 일원이라는 이유만으로 양심을 지킬 수 없는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문제는 제가 일반 행정직이 아니라 감사직 공무원이었다는 점입니다. 감사직은 공무원의 부패를 찾아내고 바로잡는 일을 하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조직 안에 있던 사람으로서 바라보면 다들 저마다의 사정과 이유와 배경이 있었고, 일이 이렇게밖에 될 수 없었던 맥락이 모두 이해가 되었습니다. 피감기관에 출장을 나가 허물을 캐내야 하는 사람이 속으로는 그럴 수 있지, 충분히 그럴 수 있어 하고 있었습니다. 시정 요구를 하고 권고를 내리고 그들이 그것을 성실히 이행한다고 해서 정말 바뀌는 것이 있을지도 저에게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저는 감사를 할 수가 없었고, 사무실에 있을 때도 출장을 나가서도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모든 상황을 다 이해하려던 저의 태도가 가장 나쁘게 작동한 자리가 하필 감사라는 직업이었던 것 같습니다.
다섯 걸음마다 벤치에 눕던 날들
그때 받은 진단명은 우울증이었습니다. 다만 제 느낌으로는 마음이 우울하다기보다 정신이 기능을 잃어버린 상태에 가까웠고, 제대로 된 판단도 일상생활도 불가능했습니다. 공무원으로 일한 2년의 기억은 지금 제 머릿속에 군데군데만 남아 있는데, 너무 힘든 시기여서 방어기제가 그 기억을 도려낸 것 같습니다. 남아 있는 장면 가운데 하나는 책상 앞에서 키보드를 치는 모습입니다. 손가락을 움직일 힘이 나지 않아서 손끝에 모든 에너지를 실어 겨우 한 글자씩 쳤고, 마우스를 조금 움직이는 일도 물리적으로 힘에 부쳤습니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조차 힘들었고, 길을 가다가 다섯 걸음쯤 걸으면 기운이 빠져 벤치에 드러누웠다가 조금 힘이 돌아오면 다시 대여섯 걸음을 걷는 식이었습니다. 겪어 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일 수 있지만 정말로 그렇게 됩니다. 결국 하루만 더 다녔다가는 정말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죽는 것보다는 퇴사가 쉽겠다는 마음으로 사직서를 냈습니다.
그 시기에 저는 엄마, 아빠에게 화를 정말 많이 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짜증 내고 소리 지를 일이 아니었는데, 휴대전화 화면에 부모님 이름이 뜨기만 해도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고 소리가 먼저 나갔습니다. 부모님을 시작으로 주변 사람들에게도 화를 내는 일이 늘어나면서, 저는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왜 이럴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퇴사 후 석 달 정도는 밥도 거의 먹지 못하고 내내 누워만 지냈습니다. 공무원은 퇴직할 때 그동안 월급에서 떼어 두었던 연금 기여금을 한꺼번에 돌려받기 때문에 손에 쥔 현금이 조금 있었고, 그 돈을 까먹으며 버텼습니다. 그렇게 누워 있는 동안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저를 이렇게 만드는 환경과 상황이 있다는 것, 제가 여유를 잃고 에너지가 바닥나면 주변 사람들에게 좋은 말과 좋은 행동이 나가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제가 소중히 여기고 싶은 사람들에게 늘 좋은 것을 건네려면 저를 소진시키는 환경에 저를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성전에서 화를 내던 예수
그 일을 겪은 뒤 복음서를 다시 천천히 읽었습니다. 예수의 가르침은 사랑이라고 배웠는데, 다시 읽어 보니 예수는 꽤 자주 화를 내고 있었습니다. 성전 뜰에서 장사하던 사람들을 내쫓으며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고 꾸짖는 장면이 있고, 마태오 복음서 23장에서는 위선에 빠진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향해 불행하다는 말을 거듭 쏟아 냅니다. 예전에 성경을 읽을 때는 이런 대목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무너져 본 뒤에야 예수도 모든 사람을 무조건 품지는 않았고, 옳지 않은 것 앞에서는 그러면 안 된다고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그때 제가 성경을 잘못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있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무조건 참고, 무조건 인내하고, 무조건 이해하고 포용하는 것이 답은 아니었습니다. 제가 먼저 바로 서 있어야 제가 원하는 베풂과 자비와 사랑의 가치도 실현할 수 있다는 것, 저에게는 이것이 그 시기를 지나며 얻은 가장 큰 깨달음이었습니다.
흑화라고 부르는 가지치기
두 번째, 세 번째 직장에서도 저는 사회생활에 쉽게 적응하지 못했고,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나르시시스트(narcissist)의 먹잇감이 되는 일이 많았습니다. 계속 털리고 무너지는 경험을 반복하다가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렸고, 저는 그것을 농담 삼아 “흑화”라고 부릅니다. 아닌 사람은 제 인생에서 치워 버려야 제가 살 수 있고, 저의 생존과 조금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는 가지를 잘라 내는 일도 필요하다는 것을 그때 배웠습니다. 20대에 만난 사람들 가운데 차단한 이름이 유독 많은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 시절의 관계는 제가 다 퍼 주고, 다 맞춰 주고, 저를 희생하는 방식으로 시작된 경우가 많았습니다. 처음부터 비대칭적으로 시작된 관계였고, 그 속에는 저를 만만하게 보고 이용하려는 사람도, 제 배려를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때의 저는 그런 사람들 때문에 힘든 것조차 신자로서 감내할 의무라고 여겼기에 관계가 유지되었지만, 30대가 되어 이렇게 살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은 뒤로는 저를 위해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직도 저를 그 시절의 모습으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던 것도 이유였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동기들과는 지금도 연락을 잘 하고 지낸다는 점입니다. 저는 그 이유가 공유하는 기억의 양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같은 학교를 다니고, 같은 동네에 살고, 기숙사 생활을 함께 하면서 쌓인 기억이 많아서, 그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히 편안합니다. 반면 학교를 떠나 바깥세상에서 만난 사람들과는 학창 시절만큼 기억을 쌓기가 어려웠고, 시간이 지나면서 관계가 어려워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착한 사람이 아니게 된 뒤에 남은 것
어릴 때 저는 착하게 살고 싶었습니다. 지금은 착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별로 들지 않고, 제가 착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으며, 착하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저에게는 꽤 이기적인 면이 있고, 성질을 부려야 할 때는 부리기도 합니다. 한 번 완전히 무너져 본 뒤로는 그 지경이 될 때까지 저를 방치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살아남으려면 어느 정도 이기적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이제는 제 나름의 기준이 있어서 선을 넘는 사람과는 바로 관계를 끊고, 직장처럼 계속 얼굴을 봐야 해서 끊을 수 없는 관계라면 선을 넘었다 싶을 때 분명하게 지적해서 상대가 그 불편함을 알게 만듭니다.
물론 관계를 끊는 일이 마음 편한 작업은 아닙니다. 두렵지는 않지만 서글픕니다. 한때는 함께 즐겁게 생각을 나누던 벗이었는데, 상황이 변하고 저도 변하고 시간이 흐르면서 더는 그때와 같은 관계를 이어 갈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이 슬픕니다. 이번에 연락처를 정리하던 며칠 동안 저는 속이 쓰리고 불편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고, 스트레스를 받으면 몸이 아파지는 사람이라 실제로 며칠을 앓았습니다. 돈을 벌어야 하니 회사는 꼬박꼬박 다녔고, 지금은 정리가 끝나 후련해졌고 몸도 조금 괜찮아졌습니다. 이 방식이 정말 옳은지도 저는 확신하지 못합니다. 20대의 저는 다 품는 것이 옳다고 믿었고, 30대 후반을 지나고 있는 저는 지금의 방향이 옳다고 믿고 있지만, 10년 뒤 40대의 저는 또 어떤 인간관계를 만들어 가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가치관도 무엇을 경험하고 무엇을 깨닫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저는 이번에 다시 느꼈습니다. 20대의 저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일을 지금의 제가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저도 제법 나이를 먹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결국은 사람이라는 생각
요즘 외주 작업을 하면서 자주 하는 생각이 있습니다. 코드는 AI가 너무 잘 짜 주고, 코드가 아니어도 웬만한 일은 AI에게 맡기면 꽤 잘 해냅니다. 그런데 누군가 타인에게 지갑을 열게 만드는 진짜 가치가 만들어지는 지점은 AI가 아니라 사람 사이의 관계에 있는 것 같습니다. 회사 생활도 거의 전부가 사람 사이의 문제를 다루는 일이고, 개인 사업자로서 클라이언트를 대하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저에게는 사람이 가장 어렵고, 그래서 가장 중요합니다. 제가 인간관계를 정리하는 것도 사람을 가볍게 여겨서가 아니라, 한정된 에너지를 제가 정말 아껴야 할 사람들에게 온전히 쓰기 위해서입니다. 옳음을 지키려면 반드시 무언가를 희생해야 하고, 관계를 버리는 일도 그 희생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만큼 그 대가로 지키려는 것은 분명해야 하고, 그러려면 저만의 기준이 있어야 하며 제가 이리저리 흔들리지 않고 중심을 잡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0대의 제가 마음속의 법을 찾아 책을 뒤졌다면, 지금의 저는 그때그때 제가 생각하는 옳음의 기준과 제 양심을 따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습니다. 요즘 수영을 배우면서 물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조금 가라앉는데, 그런 며칠을 보내고 난 지금의 저에게는 그 소리가 꽤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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